해경 72정 침몰 사고 | 속초 해경 경비정 72정
- 해경 72정 침몰 사고
해경 72정 칠몰 사고 비극의 전조


1980년 1월 23일 새벽, 강원도 고성군 앞바다는 짙은 안개와 높은 파도가 겹쳐 시정 확보가 어려운 위험한 상황이었다. 당시 해양경찰 72정은 어로 보호와 해상 경비를 위해 정기 순찰에 나선 상태였고, 인근에서는 200톤급 경비함 207함이 동일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속초해양경비안전서 기록에 따르면 당시 72정은 항해 장비 일부가 고장 난 상태였다고 전해졌다. 군사정권 시기였던 만큼 기상 악화나 장비 결함 같은 요소가 충분히 공유되지 못했으며, 이러한 복합적 변수는 새벽 시간대 해상 작전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짙은 안개 속 충돌과 침몰의 급박한 순간


사고는 1월 23일 오전 5시 20분경 발생했다. 기록에 따르면 72정은 항로 착오로 207함과 가까운 해역에서 교차 항해 중이었다. 시정이 극도로 불량했던 탓에 두 선박은 선수(船首)를 피하지 못한 채 충돌했고, 충돌 지점은 72정 측면이었다고 진교중 전 해군 SSU 대장은 설명했다.


측면 파손은 선체가 몇 분 만에 침몰하는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72정에 탑승한 승조원 17명 전원은 구조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실종됐고, 이는 해경 역사상 가장 큰 인명피해로 기록됐다. 사고 직후 보고 체계 역시 혼란스러웠으며, 군사적 보안상황 속에서 초기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이 이후 꾸준히 제기됐다.
200여 척 동원 수색에도 단 한 명도 찾지 못한 실종자


사고 이후 해경·해군·수산청 등은 한 달간 연인원 200여 척의 함정과 지도선을 동원해 반경 50마일권을 집중 수색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발견된 것은 구명벌과 일부 파편뿐이었다. 속초해양경비안전서 자료에 따르면 72정의 침몰 지점은 수심 80~120m로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체는 물론 승조원 시신조차 한 명도 수습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충돌 위치가 측면이어서 선체가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고, 시신은 대부분 선내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유실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술력과 잠수 능력으로는 수심 100m 전후 구조가 사실상 불가능해 인양 시도조차 진행되지 못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고… 기억조차 희미해진 72정


세월이 흐르며 72정 침몰 사고는 일반 국민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됐다. 사고 직후 군사정권 분위기 속에서 공식 발표와 언론 보도가 제한적이었고, 이후 해경 조직 내에서만 조용히 회자될 뿐이었다.


속초 장사동에 세워진 해양경찰충혼탑에는 순직자 17명의 위패만 봉안돼 있으며, 실종자 전원의 시신이 발견되지 못했기에 무덤조차 없다. 같은 해역에서 근무했던 해군 장교들조차 당시 사고 사실을 몰랐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제라도 찾아야 한다”… 재조명 요구와 인양 가능성


해군 해난구조대장을 지낸 진교중 예비역 대령은 “현재 기술이라면 72정은 충분히 탐색·인양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현대의 포화잠수 기술은 300m까지 작업이 가능하고, ROV(무인잠수정)나 사이드스캔소나 등 탐색 장비는 2m 크기의 물체도 식별할 수 있다.


진 대령은 “세월호와 천안함을 인양한 나라에서 60톤급 경비정을 못 찾을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국가를 위해 숨진 해경도 대한민국 국민이며, 아직도 바다에 잠들어 있는 이들을 찾아 예우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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