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랑 중령 판결 | 김오랑 중령 부인 흉상 가족 서울의봄 판결
김오랑 중령 판결
김오랑 중령 부인
김오랑 중령 흉상
1. 김오랑 중령 판결 국가 배상
2025년 8월 1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911단독 유창훈 부장판사는 김오랑 중령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김오랑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공식 인정한 것으로, 유족들에게 약 3억원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내용이다. 유족 대표인 친누나 김쾌평 씨와 나머지 유족 10명이 소송에 참여했으며, 김오랑의 사망 경위를 왜곡하고 은폐한 점이 배상 책임의 핵심으로 작용했다.
국가 측은 이미 일부 배상을 했다는 이유로 이중 배상 우려를 제기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판결은 46년 만에 내려진 것으로, 김오랑 중령의 명예 회복과 함께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김오랑 중령 프로필
- 이름 : 김오랑
- 출생일 : 1944년
- 사망일 : 1979년 12월 13일
- 고향 : 경상남도 김해
- 학력 : 김해 삼성초등학교, 삼성중학교, 삼성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25기 (1965년 임관)
- 가족 : 형 김태랑, 누나 김쾌평, 배우자 백영옥 (자녀 없음)
- 계급 : 중령 (소령에서 사후 특진)
- 소속 : 육군특전사령부 (정병주 육군특전사령관 비서실장)
3. 김오랑 중령 서울의 봄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주도 신군부 세력은 군사반란을 일으켜 서울에 주둔한 육군특전사령부를 장악하려 시도했다. 신군부가 정병주 육군특전사령관을 불법 체포하기 위해 특전사에 진입한 상황에서 김오랑은 비서실장으로서 권총 한 자루만을 들고 상관을 보호하기 위해 홀로 문 앞을 지켰다.
반란군의 진입 시도는 격렬한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김오랑은 반란군의 총탄 6발을 맞고 전사했다. 신군부 측은 처음에 김오랑의 죽음을 ‘순직’으로 기록하며 반란군의 진입을 정당화했다.



시신은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됐다가, 동료 장교들의 탄원으로 1980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이후 2022년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김오랑이 먼저 사격을 개시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이 먼저 공격한 것이 확인되면서 사망 경위가 ‘전사’로 정정됐다.
4. 김오랑 중령 부인 가족
김오랑 중령의 부인은 백영옥 씨로, 1970년 월남 파병 중 부산대 간호학과 재학 시절 만남이 시작됐다. 1972년 결혼 후 함께 생활하며 백 씨는 심각한 시력 장애를 앓았다.
1979년 3월 김오랑이 특전사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뒤 수도권 인근에 거주하며 아내의 눈 치료를 도왔다. 12·12 군사반란 당시 김오랑의 전사 이후 백영옥 씨는 군 내 관사에서 쫓겨나는 고초를 겪었다.
1987년에는 김오랑 명예 회복 및 무공 훈장 추서를 위해 법적 대응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담당해 주목받았다. 그러나 충격으로 인해 백 씨는 시력을 잃었고, 1991년 부산 자택에서 실족사한 채 발견되었다. 자녀는 없으며, 남편의 죽음과 관련된 고통을 크게 겪은 끝에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5. 김오랑 중령 흉상
김오랑 중령의 흉상은 2014년 6월 6일 경남 김해시 활천동 일대에서 지역 청년회, 주민자치회, 김해인물연구회 등의 자발적인 모금 활동을 통해 세워졌다.
이 흉상은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 세력에 맞서 상관을 지키다 전사한 김오랑 중령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기 위한 상징적 기념물이다. 김오랑 중령의 무덤 비석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위치해 있으나 이름과 ‘순직’이라는 짧은 문구만 새겨져 있어 명예가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2024년 1월 중순 경에는 부부의 이름과 ‘전사’로 사망 원인이 정정된 내용이 새롭게 각인될 예정이며, 이를 통해 명예 회복이 한층 진전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육군사관학교로 흉상이 이전될 지 주목받고 있다.
김오랑 중령 | 김오랑 중령 부인 흉상 가족 서울의봄 판결